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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지붕뚫고 하이킥 (김병욱, 2010)

29 MAR 2010

 

지붕뚫고 하이킥 - 간단 소감


 일주일 내내 계속되는 시트콤을 볼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나도 이러한데 일주일 내내 시트콤을 만드는 사람들은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내가 볼 시간이 없다고 우기는 것은 사실 웃기는 이야기다. 나는 매주 재방송 및 삼방 비롯하여 어쩌면 두번, 어쩌면 세번 에피소드를 본 적도 있었을 것이고, 어떤 에피소드는 한번도 보지 못하였다. 초반에 못 본 에피소드를 IPTV로 챙겨보기는 했었다. 하지만 나의 정력의 문제인지 방송의 장기화에 따른 식상함의 문제인지, 챙겨보기는 힘들고 가끔씩 보이는 재방송의 힘을 느끼며(매번 보니까) 내용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하자. 하지만 끝을 갈수록 극의 식상함이 익숙해 지고, 마침내 그냥 보여주는 재방송도 보지 않게 된다.
 
 이러다가 극이 종반부에 이르고 마침내 끝이 났다. 당연하지만 마지막 회를 지켜보지 못한 상태에서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들은 이 에피소드의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대부분의 이 시트콤의 결말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귀신 세경이라는 내용을 보면서 마지막 회를 반드시 봐야 하겠다고 생각했다.(정말 인기 있고, 끝까지 관심을 끄는 시트콤에는 분명해 보인다.)
 
 딸과 같이 본 마지막 회에서 딸은 죽음이란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죽었다는 것은 다들 알 것이다.) 사실 나는 차 안 대화에서 많은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이 시트콤이 기본적으로 세경이란 인물이 계급의 가장 밑 바닥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또 아무리 똑똑하고 노력해도 희망이 없다는 것을 마지막 회를 통해 극명하게 들어내어 주었다. 결국 21세기이고 민주화된 세상이지만, 결국 부모 없고, 배경 없는 세상에서 근면하고 똑똑하다 하더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못하는 배경의 슬픔이 있다. 그것이 동생에게 똑같이 전파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정음이가 21세기의 88만원 세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벽을 넘지 못하는 것처럼 88만원 세대의 슬픔은 세경이가 대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지난친 비약일 수 있다. 시트콤 자체에 이런 주제를 안고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였다고는 하나, 극이 기본적으로 러브 라인에 벗어나지 못하고, 웃음에 소비한 것에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세경이를 중심으로 한 여러 사람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실제로 그러했지만, 역시 식상한 러브라인으로 중반을 지나 아쉽다. 모든 주제가 다 묻혀 버리는 느낌이다. 마지막에 이런 느낌에 강한 임팩트를 주는 부분이 있으나, 그 동안 열심히 러브라인에 열광했던 시청자에게는 아마 배신이었을 것이다.
 
 세경이의 존재는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최하층을 대표하여 주었고, 세경이가 근면하고 똑똑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이 신분의 벽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시트콤을 통해 알려주었다. 또한 이런 신분은 대물림된다는 것을 극의 마지막을 통해 알려준다. 그래서 동생에게 대물림되는 것이 싫어 이 나라를 떠나고, 어쩌면 세상을 살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름 비약이 심한 평이었다. 어쩌면 한겨레 21의 “투표 순재 무투표 세경”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88만원 대표 정음이의 성공은 또 어떤 식으로 풀어야 할까!




7 DEC 2017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가슴 깊이 많은 여운을 남긴다.


여러 논란이 있지만, 나는 내가 쓴 위의 내용을 아직도 지지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의 동전 던지는 운명처럼, 가난한 자에게는 계층 탈주의 희망이 적다. 물론 벗어나서 잘 사는 것도 운명이지만, 반대로 아주 높은 확율로 잘 못 사는 것이 운명일 것이다. 이것이 극중 주인공인 세경이가 근면하거나 지적으로 똑똑하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면에서 운칠기삼이라는 말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