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 "대필아니다"

junemustgo 2015. 9. 21. 19:40

13 NOV 2007

  오늘 자 기사에 진실과 화해위에서 김기설씨 유서는 대필이 아니고 본인의 것이고 이 사건의 재심을 권고했다. 일단 한 걸음 시작한 것이다

  강기훈씨 유서 대필 사건은 1991년 당시 전민련(전국 민족 민주 운동 연합)사회부 부장이었던 김기설씨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주장하며 옥상에서 분신 자살한 사건이었다. 이때 사건의 방향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 당시 서강대 박홍 총장을 비롯한 세력들이 죽음을 부추기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는 식으로 나오고, 그간 민주화를 위하여 분신 자살한 분들의 동기화 민주화 세력의 도덕성에 상처를 준다. 이때 강기훈씨가 유서 대필자로 지목을 받아, 구속 후 만기 출소(3)을 한다.

  몇번의 TV 시사프로에서도 일본의 전문가를 통하여 유서가 본인의 것이고 대필이 아닌 것이 방송되었고, 또 국과수에서 뇌물을 받고 필적 감정을 잘못 하여주는 사례로 구속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당시 공안정국과 공안 검찰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이제 국가기관인 진실과 화해위에서 재심을 권고했다. 하지만 아직도 이 사건은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다. 그리고 불과 십 몇 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검찰 분들은 “과거의 명백한 수사결과까지 뒤집는다면 앞으로 모든 국민이 검찰을 신뢰하지 않게 돼 국가 체계가 제대로 성립되겠느냐”등의 말씀을 하셨고, 위 결과에 대해 받아 들이지 않는 입장이라고 한다.

  당시에 검찰을 우리들은 "권력의 시녀"라고 한 바 있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독립된 기관으로 인정받고자 한다면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도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강기훈씨가 자진 출두하기 전에 명동성당에 공권력을 피해 보호를 받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 분의 애인과도 같이 있었다. 오늘 인터뷰 기사를 보니, "자식에게 아빠가 죄가 없다는 것을 알려 기쁘다."란 내용이 있었다. 그때의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이 기억나는데, 그 때 그분이랑 잘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짧게 해 보았다.

 

21 SEP 2007

일단 사건의 이름이 변경되었다. '강기훈씨 유서 대필 사건'에서 '강기훈씨 유서 대필 조작 사건'으로 변경되었다. 위에 내가 그날의 기억을 작성하였듯이 2007년 11월 13일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서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국가에 대해서 재심과 사과를 권고했다. 그리고 2012년 재심을 시작해서 2015년 5월 14일 최종 무죄를 확정했다. 사건 발생이후 만 24년이 걸린 이후이다.

이 사건은 프랑스의 드레퓌시 사건과 유사하여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고 불린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1991년은 이런 억울한 사건들이 많이 생길 수 있는 공안 정국이었다. 지금이 훨씬 나은 세상이라고 느끼면서 산다.